내 신호만 골라내는 부품, 필터와 듀플렉서 — 잘 막을수록 손해도 커진다 (RF 개발자가 설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폰 안테나에는 온갖 전파가 다 들어오고 있습니다. 방송 전파도, 와이파이도, 근처 사람들의 통화도, 기지국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신호도 전부입니다.

안테나는 그걸 가리지 않습니다. 들어오는 대로 다 받습니다.

그런데도 내 통화만 들리고 남의 통화는 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골라내는 걸까요. 지도 글에서 안테나 다음 정거장으로 잠깐 지나갔던 부품, 필터가 하는 일입니다.

먼저 흔한 오해부터

❌ “안테나가 내 주파수만 받는다”

안테나는 생각보다 너그럽습니다. 폰 안테나는 여러 밴드를 함께 감당해야 해서 넓은 범위를 받도록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골라내는 일은 안테나가 아니라 그다음 부품이 맡습니다.

❌ “잘 막는 필터가 무조건 좋은 필터다”

이 글의 핵심입니다. 잘 골라낼수록 대가가 따릅니다. 남의 신호를 매섭게 잘라내는 필터는 대개 내 신호도 그만큼 더 깎습니다. 어디서 멈출지를 정하는 게 설계입니다.

❌ “송신과 수신은 번갈아 한다”

밴드에 따라 다릅니다. 시간을 나눠 쓰는 방식도 있고, 주파수를 나눠서 동시에 주고받는 방식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는 쪽에서 듀플렉서가 필요해집니다. 뒤에서 보겠습니다.

필터가 골라내는 법

직구폰 글에서 필터를 벽에 뚫은 창에 비유했습니다. 이번엔 그 창을 조금 가까이서 봅니다.

필터의 통과 특성을 나타낸 개념도. 가운데 통과대역에서는 신호가 지나가고 양옆 저지대역에서는 크게 줄어들며, 통과대역 꼭대기가 손실 없는 기준선에 닿지 않아 삽입손실이 생기고, 통과대역과 저지대역 사이의 기울기가 급할수록 잘 골라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운데는 지나가고 양옆은 막힌다. 다만 지나가는 쪽도 조금은 깎인다.

가운데 볼록한 자리가 통과대역입니다. 내 신호가 쓰는 주파수가 여기 놓입니다. 양옆으로 뚝 떨어진 자리는 저지대역이고, 남의 신호는 여기서 걸립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눈여겨볼 만합니다.

하나는 양옆으로 떨어지는 기울기입니다. 이 기울기가 급할수록 내 신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남의 신호까지 잘라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파수 구획은 서로 딱 붙어 있어서, 이 기울기가 곧 골라내는 실력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통과대역 꼭대기가 기준선에 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나가라고 만든 자리인데도 지나가는 것만으로 조금 깎입니다. 이걸 삽입손실이라고 부릅니다. 통행료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그리고 이 둘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기울기를 급하게 만들수록 통행료가 비싸집니다. 잘 골라낼수록 손해가 커진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면 — 왜 급하게 자를수록 손해가 날까 👉 클릭하면 펼쳐집니다

필터는 공진으로 골라냅니다. 그네가 제 박자에 맞춰 밀 때만 크게 흔들리듯, 특정 주파수에서만 유난히 잘 반응하는 성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진 하나로는 기울기가 완만합니다. 봉우리 하나짜리 산은 옆구리가 밋밋하니까요. 그래서 실제 필터는 공진을 여러 개 이어 붙여 만듭니다. 봉우리를 여러 개 겹쳐 옆구리를 가파르게 세우는 셈입니다.

대가는 여기서 나옵니다. 단이 늘어날수록 신호가 지나가야 할 관문도 늘어납니다. 관문마다 조금씩 깎이니 통행료가 쌓입니다. 부품이 커지고 자리도 더 먹습니다.

그리고 공진이 얼마나 날카롭게 서는지도 재료가 정합니다. 흔들림이 오래 유지되는 재료일수록 봉우리가 뾰족하고 손해가 적습니다. 이 성질을 Q라고 부릅니다. 좋은 필터를 만드는 일이 곧 Q가 높은 재료와 구조를 찾는 일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필터 고르기는 늘 흥정입니다. 옆 대역을 얼마나 잘라낼 것인가내 신호를 얼마나 덜 깎을 것인가 사이에서, 이 폰이 쓰는 대역 사정에 맞는 지점을 고릅니다.

안테나는 하나인데, 주고받기는 동시에

이제 듀플렉서입니다.

폰에는 주파수를 나눠서 주고받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보낼 때 쓰는 주파수와 받을 때 쓰는 주파수를 서로 떨어뜨려 놓고,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통화 중에 상대 말을 들으면서 내 말도 보내는 상황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문제는 안테나가 하나라는 점입니다. 나가는 신호와 들어오는 신호가 같은 문을 쓰는데, 둘을 갈라놓지 않으면 사고가 납니다.

듀플렉서의 역할을 나타낸 개념도. 안테나 하나에서 듀플렉서를 거쳐 내보내는 쪽 PA와 받는 쪽 LNA로 길이 갈라지며, 내보내는 센 신호가 받는 쪽으로 새어 들어가면 아주 약한 수신 신호를 덮어버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을 갈라놓고, 서로 새어 들지 않게 막는 것이 듀플렉서가 하는 일이다.

사고가 나는 이유는 두 신호의 덩치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도 글에서 봤듯 내보내는 신호와 받아야 하는 신호의 차이는 2조 배에 이릅니다. 내 폰이 내보내는 신호가 내 폰의 수신 쪽으로 조금만 새어 들어가도, 그 약한 신호는 그대로 묻힙니다.

바로 옆에서 누가 고함을 지르는 동안 먼 데서 오는 속삭임을 들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그 고함을 지르는 게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듀플렉서는 필터 한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보내는 쪽 주파수만 통과시키는 필터와, 받는 쪽 주파수만 통과시키는 필터를 안테나 하나에 붙여 길을 갈라놓습니다. 얼마나 잘 막는지를 격리도라고 부릅니다.

흔히 50dB대를 확보합니다. dB는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 10dB마다 열 배씩 뛰는 단위입니다. 50dB면 열 배가 다섯 번, 그러니까 십만 배입니다. 막는 쪽으로 쓰면 십만 분의 1로 줄인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앞서 본 차이가 2조 배였으니, 십만 분의 1로 줄여도 아직 한참 남습니다. 듀플렉서 혼자 감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도 글에서 봤듯, 나머지는 내보내는 주파수와 받는 주파수를 얼마나 떨어뜨려 놓았는지, 그리고 뒤따르는 부품들이 큰 신호가 섞여 들어와도 얼마나 견디는지가 함께 나눠 집니다. 폰 전체가 여러 겹으로 막는 셈이죠. 그 첫 겹을 듀플렉서가 맡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통행료가 붙습니다. 듀플렉서의 삽입손실은 대략 1~2dB대입니다. 그리고 이 손해는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보내는 쪽에서 잃은 만큼은 배터리로 메워야 하고, 받는 쪽에서 잃은 만큼은 감도 손해로 남습니다. PA 글에서 본 발열과 배터리 이야기가 여기서도 이어집니다.

빼면 안 되고, 넣으면 비용을 치릅니다. 반드시 치러야 하는 비용을 최소한으로 깎는 일이 제 몫입니다.

📐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면 — 듀플렉서와 다이플렉서는 다르다 👉 클릭하면 펼쳐집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자주 헷갈리는 두 부품이 있습니다. 하는 일은 둘 다 길을 가르는 것인데, 가르는 상황이 다릅니다.

듀플렉서같은 밴드 안에서 내보내는 쪽과 받는 쪽을 가릅니다. 두 주파수가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붙어 있는 것을 갈라야 하니 앞에서 본 급한 기울기가 필요하고, 그만큼 만들기 어렵습니다.

다이플렉서서로 멀리 떨어진 두 대역을 가릅니다. 낮은 대역과 높은 대역처럼요.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낮은 쪽만 지나가게 하는 필터높은 쪽만 지나가게 하는 필터를 붙이는 정도로 해결됩니다. 갈라야 할 간격이 넓어서 훨씬 수월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붙어 있는 것을 가르면 듀플렉서, 떨어져 있는 것을 가르면 다이플렉서. 어려움의 차이가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일로 돌아오면

  1. 밴드가 많은 폰일수록 필터가 많이 들어간다. 필터는 밴드마다 따로 필요합니다. 지원 밴드 목록이 신중하게 정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 신호를 키워준다는 스티커나 액세서리는 효과가 없다. 골라내고 키우는 일은 정해진 구조와 전원을 가진 부품이 합니다. 붙이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3. 통화 품질이 좋은 폰과 신호 막대가 잘 뜨는 폰은 다르다. 화면 맨 위 안테나 표시, 그러니까 신호 막대는 받은 세기만 보여줍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골라냈는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4. 폰이 뜨거울 때 통화가 답답해지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손실을 메우려면 내보내는 쪽이 더 일해야 하고, 그건 열로 돌아옵니다. 온도와 배터리 글에서 다룬 고리와 이어집니다.

정리하면

안테나는 다 받습니다. 그중 내 신호만 남기는 일을 필터가 합니다. 통과시킬 자리는 남기고 나머지는 떨어뜨리는데, 떨어뜨리는 기울기가 급할수록 잘 골라내지만 내 신호도 그만큼 더 깎입니다.

듀플렉서는 그 필터를 한 쌍으로 묶어 안테나 하나에서 내보내기와 받기를 갈라놓는 부품입니다. 내 송신이 내 수신을 덮지 않도록 십만 분의 1 수준까지 막아내면서, 동시에 통행료는 최소로 유지해야 합니다.

이 두 요구가 서로 반대라서 정답이 없습니다. 어느 대역에서 무엇을 얼마나 양보할지를 정하는 일이 남습니다. 부품 사양표를 늘어놓고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폰이 어디서 어떻게 쓰일지를 놓고 하는 판단에 가깝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통행료를 치르고 살아남은 약한 신호를 받아내는 부품, LNA를 다루겠습니다. 왜 안테나에서 이 부품까지의 짧은 구간을 0.1dB 단위로 다투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궁금한 통신 현상이 있으시면 문의 페이지로 보내주세요. 좋은 질문은 그대로 다음 글이 됩니다.


글쓴이 | 전파쟁이
스마트폰의 RF 프론트엔드(RFFE)를 12년째 설계하고 있습니다. 안테나 뒤에 붙는 필터·PA·LNA 같은 부품을 고르고 회로를 설계해서, 부품과 모듈이 합쳐진 완성된 폰 상태에서 실제로 성능이 나오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블로그는 소속 회사와 무관한 개인 공간이며, 3GPP 공개 표준과 직접 측정한 데이터를 근거로 씁니다. 블로그 소개 보기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