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해외 직구폰이 국내에서 안 터지는 이유를 다뤘습니다. 폰이 팔릴 지역에 맞춰 필터가 들어가고, 없는 밴드는 지나갈 창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만들 거, 필터 몇 개 더 넣어서 다 되게 하면 안 되나?”
저도 그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리고 대답하기가 늘 조금 어렵습니다. 안 넣는 게 아니라 하나를 더 넣는 일 자체가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안쪽 이야기입니다.
먼저 흔한 오해부터
❌ “부품값 조금 더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돈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폰 안에서 가장 아쉬운 건 돈이 아니라 자리입니다. 기판은 이미 꽉 차 있고, 부품 하나가 들어가면 다른 무언가가 밀려납니다. 배터리를 조금 줄이든, 다른 기능을 포기하든 어딘가에서 대가를 치릅니다.
❌ “밴드가 하나 늘면 할 일도 하나 는다”
늘어나는 건 하나가 아닙니다. 새 밴드는 기존 밴드 전부와 이웃이 됩니다. 그래서 확인할 항목은 하나가 아니라 기존 밴드 수만큼 늘어납니다. 이 글의 절반이 이 이야기입니다.
❌ “좋은 부품만 골라 쓰면 성능은 따라온다”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고, 제 일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부품 각각이 규격을 다 만족해도, 합쳐놓으면 안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품은 혼자 있을 때의 성능으로 팔리지만, 폰은 다 붙여놓은 상태로 팔리기 때문입니다.
필터 하나를 넣으면, 따라오는 것들
먼저 눈에 보이는 것부터 봅니다.

필터가 하나 늘면 그 필터로 신호를 보낼 스위치의 포트가 하나 더 있어야 합니다. 포트가 늘면 스위치 자체를 더 큰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리고 그 필터까지 이어지는 배선을 새로 깔아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림을 고치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길이 하나 늘면, 그 길은 옆의 길들과 이웃이 됩니다.
지도 글에서 Tx 라인과 Rx 라인을 최대한 떼어놓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가는 신호는 세고 들어오는 신호는 약해서, 둘이 가까이 붙으면 센 쪽이 약한 쪽으로 새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리는 좁고 이웃은 늘었습니다. 새로 놓은 길을 어디로 지나가게 할지가 곧 어느 길 옆에 붙일지의 문제가 됩니다.
📐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면 — 선을 어디로 지나가게 할 것인가 👉 클릭하면 펼쳐집니다
기판은 평면 한 장이 아닙니다. 얇은 판을 여러 겹 쌓아 만들고, 선은 층과 층 사이를 오갑니다. 그래서 두 선을 떼어놓는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같은 층에서 옆으로 멀리 놓는 것과 다른 층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둘 다 자리를 씁니다. 옆으로 벌리면 그만큼 면적이 들고, 층을 옮기면 층을 뚫고 내려가는 구멍이 필요합니다. 그 구멍도 자리를 차지하고, 지나갈 때 손해도 조금 생깁니다.
그리고 이건 한 번 정하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새 선 하나를 놓으면 그 선 주변의 다른 선들도 다시 봐야 합니다. 밀려난 선이 또 다른 선 옆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밴드를 하나 얹는 일은 그림 한구석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판 전체를 다시 짜는 일에 가까워집니다.
제가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이 여기 있습니다. 회로도상으로는 이미 다 맞는데, 실제 기판에 올려놓으면 안 나오는 경우를 찾아 고치는 일입니다.
진짜 어려운 건 ‘조합’입니다
부품을 넣고 배선을 깔았다고 끝이 아닙니다. 이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밴드를 하나 추가했으니 그 밴드 하나를 확인하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폰은 밴드를 하나씩만 쓰는 게 아니라 여러 밴드를 동시에 쓰기 때문입니다.

밴드가 20개라면 둘씩 짝지어보는 경우의 수만 190가지입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얹으면 짝은 하나가 아니라 스무 개가 한꺼번에 늘어납니다. 기존 밴드 전부와 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로 확인하는 건 규격이 정해둔 조합이지 모든 짝은 아닙니다. 아무 밴드나 마음대로 묶어 쓰는 게 아니라, 묶어 쓸 수 있는 조합이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도 방향은 같습니다. 밴드 수보다 조합이 훨씬 빠르게 불어납니다.
그리고 이 확인은 서류 작업이 아닙니다. 조합마다 실제로 신호를 넣어보고 성능이 나오는지 봐야 합니다. 한쪽이 나가는 동안 다른 쪽이 제대로 받는지, 서로 방해하지 않는지를요.
부품은 규격을 만족하는데 폰이 안 되는 경우
이 글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부품에는 각각 규격이 있습니다. 필터는 어느 대역을 통과시키고 어느 대역을 얼마나 막는지, PA는 어느 범위에서 얼마나 깨끗하게 내보내는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부품 회사는 그 규격을 만족하는 물건을 만들어 팔고, 실제로 그 규격을 만족합니다.
그런데 다 사다가 붙여놓으면 안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품 규격은 그 부품 하나만 놓고 잰 값입니다. 실제 폰에서는 앞뒤로 다른 부품이 붙고, 옆에는 다른 길이 지나가고, 전원은 나눠 쓰고, 열은 서로에게 전해집니다. PA 글에서 깨끗하게 보내려면 여유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여유가 합쳐놓은 상태에서도 남아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 일은 부품을 고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른 부품들이 한 판 위에서 같이 동작할 때 성능이 나오는지를 확인하고, 안 나오면 원인을 찾아 고치는 일입니다. 12년째 하고 있는 일의 한복판이 여기입니다.
📐 조금 더 깊이 알고 싶다면 — 그래서 부품을 묶어서 넣는다 👉 클릭하면 펼쳐집니다
요즘 폰은 이 앞쪽 구간의 부품들을 낱개로 넣지 않고 하나로 묶은 모듈로 넣습니다. 지도 글에서 다룬 흐름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자리와 손실입니다. 낱개로 늘어놓으면 부품 사이를 잇는 선이 길어지고, 선이 길면 지나갈 때마다 신호가 깎입니다. 묶어놓으면 그 거리가 짧아집니다. 차지하는 면적도 줄어듭니다. 앞에서 본 ‘자리 싸움’에 바로 효과가 있습니다.
덧붙여, 묶인 상태로 받으면 그 안쪽 조합은 이미 맞춰져 있는 셈이라 손이 조금 덜 갑니다. 다만 이건 이유 중 하나이지 주된 이유는 아닙니다. 모듈이 들어와도 그 모듈과 폰의 나머지가 만나는 지점은 여전히 남아 있고, 실제로 문제가 생기는 자리도 대개 거기입니다.
그래서 폰을 고를 때 무슨 의미가 있나
- 지원 밴드 목록은 대충 정해진 게 아니다. 사양표에 적힌 밴드 하나하나가 자리를 내주고 확인을 거쳐 올라간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목록 밖의 밴드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맞습니다.
- 지역별로 다른 모델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전 세계 밴드를 한 판에 다 올릴 수 없으니, 지역별로 쓸 밴드를 골라 판을 따로 짭니다. 직구폰 글에서 본 문제의 뿌리가 이것입니다.
- 밴드 수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폰은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쓰는 밴드가 들어 있는지입니다. 쓰지도 않을 밴드가 스무 개 더 있어도 통신 품질이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 같은 기종인데 통신 품질이 다르다는 후기가 있다면. 판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폰마다 신호가 다른 이유에서 다룬 이야기와 이어지는 지점입니다.
정리하면
밴드를 하나 더 넣는 일은 부품 하나를 사서 붙이는 일이 아닙니다. 기판에 자리를 내고, 스위치에 포트를 늘리고, 새 길을 깔고, 그 길이 옆 길을 방해하지 않는지 보고, 기존 밴드 전부와 함께 동작할 때도 성능이 나오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원 밴드 목록은 넣을 수 있는 만큼 넣은 결과입니다. 안 넣은 게 아니라 넣으려면 무언가를 내줘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밑바닥에는 부품 각각이 규격을 만족해도 합치면 안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깔려 있습니다. 부품은 혼자 있을 때의 성능으로 팔리지만, 폰은 다 붙여놓은 상태로 팔립니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제 일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오늘도 계속 등장한 필터를 정면으로 다루겠습니다. 내 신호만 골라내고 남의 신호는 막아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골라내는 능력과 지나갈 때의 손해가 왜 항상 맞바꿈인지 설명하겠습니다.
궁금한 통신 현상이 있으시면 문의 페이지로 보내주세요. 좋은 질문은 그대로 다음 글이 됩니다.